(소설) 샐러리맨 – 제15장 (3)

혼절한 서정의 몸이 기이하게 변하며 기묘한 광채가 시나브로 희미하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때, 여은혜는 기절한 채로 서정의 품에 안겨 있었는데, 문득 정신을 차렸다가 깜짝 놀랐다. 자신이 서정의 품에 안겨 있는 데다 기묘한 광채가 마치 연기처럼 서정에게서 모락모락 배어났기 때문이다. 

급히 서정의 품을 벗어난 여은혜는 주변을 살피다가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 초대형 거미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비로소 그녀는 후계자의 공격에 이곳으로 떨어진 후에 다행스럽게도 거미줄에 걸려서 죽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여은혜가 다소 충격을 받았는지 멍한 눈으로 기묘한 광채에 휩싸인 서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미 잃은 아기고양이 같은 눈으로 서정을 바라보면서 저절로 마음이 약해졌다. 

“내가 기절한 동안에 뭔가 사단이 벌어진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현상은 만년삼왕과 같은 영약을 복용했을 때에 일어나는 것 같아.”

여은혜가 기억을 더듬어 봐도 이곳에 떨어질 때까지 서정이 영약 부스러기라도 먹을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그렇다면 결국 죽은 거미로부터 내단을 복용했다는 것인데… 거미의 내단을 함부로 삼켜도 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네. 저런 거미가 있다는 것조차 몰랐으니.”

고개를 갸웃하던 여은혜가 죽은 거미의 얼굴을 우연히 보았다.

“아니, 저건 인면지주(人面蜘蛛)잖아.”

인면지주는 장구한 세월을 살아가면서 천지간의 정기를 흡수한 덕분에 영성(靈性)을 지닌 영물이었다. 

“그럼 독단(毒丹)을 삼켰다는 의미잖아. 그렇다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는데… 이상하네.”

여은혜의 말이 끝나자마자 서정의 전신은 마치 자동제세동기(AED)로부터 고압전류의 충격을 받은 것처럼 활 모양으로 크게 휘어졌다. 그것은 그녀조차 실로 상상도 하지 못했던 장면이었다.

여은혜는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품속에서 공청석유가 담긴 용기를 꺼냈다. 그것은 나중에 여은혜 자신이 마시려고 만들었던 여분(餘分)이었다. 

“나를 위해 후계자의 공격을 맨몸으로 막았으니 이 정도 보답은 하는 게 인지상정이겠지.”

그녀는 서정의 입을 벌려 공청석유 몇 방울을 조심스럽게 흘려주었다. 

잠시 후, 서정의 체내로 흡수된 공청석유가 독단과 중화 반응을 일으키더니 이윽고 그의 몸이 은은한 황금빛으로 물들어 갔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사방으로 황금빛 광채를 뿜어냈다.    

“헉!”

외마디 비명이 여은혜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녀를 놀라게 만든 황금빛 광채는 서정이 반로환동(返老還童)의 경지에 도달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서정의 내공이 조금만 부족했더라면 거미의 독단으로 인하여 주화입마(走火入魔)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적절한 시기에 여은혜가 공청석유를 복용시킴으로써 독단을 중화시켜 반로환동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하늘이 내린 기연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대체적으로 기연이란 게 그렇듯이 지극히 우연한 기회가 겹쳐져서 필연이 되고, 그 필연이 또 다른 우연한 기회를 만남으로써 기어이 운명이 되고 만다. 그리고 지금 서정에게 일어난 것은 우연과 필연의 쌍곡선이 빚어낸 여은혜와의 운명적 만남이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기연을 받아들일 능력이 갖추어져야 비로소 그 기연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소리 없이 서정에게 다가온 운명은 너무도 침착하고 다소곳하게 그의 곁에서 돕고 있었다. 물론, 여전히 기절해 있는 서정은 이런 상황을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서정의 몸에서 발출되던 황금빛 광채가 차츰 잦아들 무렵, 서정이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으음!”

“이제 정신을 차렸나요?”

“그런 것 같은데요.”

“다행이군요. 그럼 됐어요.”

여은혜가 서정을 바라보면서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에 서정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다행이라니… 그게 무슨 뜻인가요?”

여은혜는 대답 대신에 손가락으로 죽어 있던 거미를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키는 거미를 바라보던 서정이 그제서야 거미가 뱉어냈던 독단을 자신도 모르게 삼켰음을 기억했다. 

“아하, 그러니까 거미의 독단을 삼켰는데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의미로군요.”

“뭐, 그런 의미도 있지만 차츰 알게 될 거예요.”

여은혜는 뭔가 할말이 있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넉넉한 마음과 따스한 시선으로 그의 마음을 다독이고 싶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마음은 어지간히 아리고 거북스러웠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침묵이 이어졌고 공기는 여전히 무거웠다. 일시적인 친구 관계이긴 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여전히 어색함이 가슴에 남아 출렁거렸던 탓이리라. 그래서 서로 간에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을 빨리 추스르고 답답한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기도 했다. 

서정이 여은혜에게 직접 말한 적은 없지만, 원래 그의 계획은 여은혜를 구출한 다음에 즉시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이 공교롭게 되느라고 후계자의 공격을 받은 두 사람이 이런 곳으로 추락했고, 어쩔 수 없이 합력해서 탈출해야 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렇듯 상황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음에도, 두 사람 사이의 어색함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마음에 간직한 비밀 아닌 비밀 때문에 여은혜는 서정 앞에서 못난이로 보일까 봐 극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여은혜의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메아리를 일으킬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까 그 동안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게 있었습니다.” 

서정이 여은혜에게 안면을 바꾼 채 진지하게 말했다. 

“메아리가 되돌아온다는 것은 이곳이 생각만큼 넓은 공간이 아닌 듯합니다만.”

여은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이곳을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게 문제예요.”

서정이 거미줄을 조심스럽게 밟으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마치 어긋난 뼈들이 맞춰지듯 우두둑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고, 전신 근육들이 일제히 요동쳤다.

“아으!”

몸이 무겁고 거북한 느낌이 들었는데, 일거에 해소되는 듯했다. 

서정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나가야 할 길이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메아리가 들려오지 않은 방향이었다. 

(메아리가 들려오지 않는다는 것은 그곳이 막히지 않았다는 것이겠지.)

서정은 자신의 생각을 여은혜에게 밝혔고, 그녀도 서정의 생각에 동의했다. 

“그렇다면 방향은 정해졌는데 어떻게 그 방향으로 움직이냐는 것만 남은 셈인가요?”

여은혜의 혼잣말에 서정은 딱히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도 어떻게 움직일지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정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정말 답이 없네요. 거참, 고약하게 꼬이고 말았군요.” 

서정이 잠시 말을 멈추더니 이윽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말입니다.”

“뭔가요?”

“이런 말을 하게 될 줄 몰랐지만… 제 몸이 예전과 달라진 것 같습니다.”

“달라졌죠. 그것도 아주 많이.”

“마치 몸에 맞지 않은 두꺼운 외투를 입은 듯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왜 그런 겁니까?”

“그 질문을 왜 지금 하나요?”

서정에게 따지듯 질문하는 여은혜였다. 

(너는 이미 내 몸이 변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 거냐? 황당하네. 진작 말해 주면 어디 덧나냐? 친구로 지내자고 먼저 제안한 것은 너였잖아!)

이런 생각을 했지만 서정은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그, 그게… 정신을 차렸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느끼긴 했는데 불쑥 말하기도 그렇고. 아무튼 그 점은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미안할 건 없고요,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거미가 토해낸 독단을 삼킨 것 같아요. 제가 깨어났을 땐… 그 독 기운 때문에 당신이 기절한 것을 발견했거든요. 그래서 중화시킬 목적으로 공청석유를 복용시켰죠. 그랬더니 황금빛 광채를 발산하면서 반로환동한 것 같아요.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아하, 그래서 지금 이런 느낌이 드는 건가 봅니다.”

“실은 간단한 문제랍니다. 몸은 반로환동의 경지에 들었는데, 그 경지에 맞는 진기 운용법의 원리를 정립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 말인즉, 적합한 심법(心法)이 필요하다는 것이 아닌가요?”

“네. 다행히 반야신공(般若神功)을 알고 있답니다.”

“반야신공이라니요? 실전(失傳)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난감하군. 반야신공이 어떤 무공인지 뻔히 아는데… 그걸 가르쳐 달라고 요구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모른 척하고 넘어갈 수도 없고. 하늘은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내리신단 말인가!)

너무 엉뚱한 장소에서 너무 엉뚱한 여은혜를 만난 데서 기인한 황당함이 없지도 않았지만, 어쨌든 남소리의 비기를 완성하기 위해서 서정에게 필요한 무공이 바로 반야신공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반야신공은 사부의 유명(遺命)에 따라 반드시 찾아야 하는 심공이기도 했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서정의 애매한 태도가 여은혜에게는 곧 재미있는 여흥거리로 둔갑을 했다. 그래서 그랬던 걸까? 암흑으로 뒤덮힌 환경 속에서 그녀가 모처럼 가뿐하게 웃었다. 

“호호호! 보물의 주인은 하늘이 정한다고 하던데 반야신공도 그런가 보군요.”

부끄러움이나 어색함 같은 것은 이미 암흑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여은혜에게도, 서정에게도.

그녀의 웃음소리를 듣자마자 서정은 안도감을 느꼈다. 그가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그는 비로소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이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을 만끽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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