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평등이 어떤 자유를 위협한다는 말인가?

 
[기고] 자본의 민주주의 vs. 경제민주주의 송태경 경제민주화를 위한 민생연대 사무처장 2017.06.29 15:08:29   .po_warp {width:954px; margin: 0 auto;} .po {float:left; width: 455px; margin:0px 10px;}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란 자본관계(또는 자본과 임노동관계)라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생산관계를 가진 생산양식을 말하며, 자본주의(capitalism)란 바로 이처럼 역사적으로 특수한 생산관계에 기초해서 시장경제를 출발점이자 배경 또는 환경으로 운동하는 경제를 말한다.

반면에 시장경제(market economy)란 말 그대로 “상품 교환의 장(field)”인 시장이 형성된 경제를 말한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 아니 그 이전부터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우리의 전통적인 3일장, 5일장 같은 시장들은 대개 소생산자들이 자신의 생산물의 일부를 관행적으로 약속한 날 약속한 장소에서 거래하면서 형성되는 시장으로 자본관계라는 특수한 사회적 관계없이도 성립될 수 있는 시장경제이다. 한마디로 시장경제는 다양한 사회적 생산관계를 바탕으로 할 수 있고(심지어 시장경제는 노예제나 봉건제 또는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바탕으로 할 수도 있으며, 몬드라곤 협동조합 복합체와 같이 생산자소유기업들을 바탕으로 할 수도 있다!) 자본 관계(따라서 자본주의)없이도 성립할 수 있는 개념이다.

또한 시장경제는 모두가 다 “자유로운” 판매자와 구매자로 “대등하게 만나” “준 것만큼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받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받은 것만큼 주는 평등”을 전제로 하는 경제로, 자유와 평등은 시장경제를 지탱하는 기본적인 두 요소이자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는 행동양식이다. 

반면에 자본주의(capitalism)는 시장경제를 출발점이자 배경 또는 환경으로 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다른 유형의 시장경제들과 구분하여 특히 자본주의 시장경제라고 하지만, 자본주의를 지배하는 네 가지 자본형태인 화폐자본(또는 금융자본), 산업자본, 상품자본(또는 상업자본), 토지자본을 통해서도 한 눈에 알 수 있듯이, “준 것보다 더 많이 받는 또는 받은 것보다 더 적게 주는 불평등”을 전제로 하는 경제로,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면 실질적 평등이 아니라 “형식적 평등” 또는 “본질적으로 불평등”한 경제다. 

즉, 시장경제의 원리에 따르면, 자유로운 시장참여자가 100원 어치를 주면 100원만 받아야 하는 것이 시장경제의 기본적인 룰이자 행동양식이며, 이것이 곧 시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위한 대전제다. 

반면에 시장을 배경으로 운동하는 자본은 준 것보다 더 많이 받아야 한다. 화폐자본(또는 금융자본)에서는 100을 줬다면 그 대가인 이자와 합쳐 예컨대 110을 받아야 하고, 산업자본, 상품자본(또는 상업자본)에서는 100을 투자했다면 그 투자의 목적인 이윤과 합쳐 예컨대 110을 회수해야 하고, 토지자본에서는 사용의 대가인 지대(흔히 임대소득이라 하지만, 여기에는 토지사용의 대가인 지대와 함께 건물의 가치감가비용 등의 포함된다!)를 합쳐 예컨대 110을 받아야 한다. 

만일 자본의 운동이 시장경제원리와 꼭 같이 처음 100에 대해 100만을 받는다면, 시작과 끝은 꼭 같고 따라서 운동은 무의미하게 된다. 더구나 시장에서는 경우에 따라 판매하지 못하는 등의 이유로 준 것보다 받지 못할 위험성도 있으므로, 이 경우 최선은 본전이고 손해까지 감수해야 하므로 시장경제 원리가 온전히 적용되는 것을 자본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다.

어쨌든 마르크스가 그의 자본론을 통해 명쾌하게 구분해 냈듯이, “시장경제”와 “시장경제를 출발점이자 배경 또는 환경으로 운동하는 자본주의 경제”는 이와 같이 다른 개념 다른 범주로, 그 표현하는 행위양식에서도 “시장경제”가 경제에서의 실질적인 평등을 추구하는 ‘경제민주주의'(Economic Democracy)를 뒷받침하는 물적 토대인 반면에 “자본주의 경제”는 본질적인 불평등을 전제로 자본의 평등을 추구하는 ‘자본의 민주주의'(capital’s Democracy, 마르크스의 표현으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Bourgeois democracy)를 뒷받침하는 물적 토대가 된다. 

다시 말해 경제민주주의는 모든 시장참여자들의 실질적 평등을 추구한다. 즉, 경제생활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경제적 관계에서 차별과 불평등을 시정 해소하거나 또는 평등을 도모하는 것이 경제민주주의다. 

그러나 자본의 민주주의는 주주자본주의 시대를 만들어낸 대표적인 기업형태인 주식회사에서의 1주 1표에 기초하는 주주평등의 원칙(stockholder’s equality principle)이나 또는 ‘One dollar, one vote'(‘1원 1표’)의 원칙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모든 시장참여자들의 실질적 평등을 배제하고 더 많이 가진 자가 더 많은 권리를 행사하는 불평등을 전제로 자본들 사이의 평등만을 추구한다. 

예컨대 자본의 민주주의에서는 자본들 사이의 경쟁의 평등을 위해 독과점은 규제의 대상일 수 있고, 동일한 자본은 동일한 이자 이윤 임대소득을 요구한다. 또한 기업에서 자본이 노동을 사용하는 관계조차도 경제민주주의에서는 자본이 노동을 사용하는 따라서 노동의 입장에서는 사용당하는 불평등한 관계로 시정 해소하거나 또는 평등을 도모해야할 대상으로 한 눈에 드러나지만, 자본의 민주주의에서는 노동을 평등하게 사용하고 있는가 등만이 문제로 된다. 

어쨌든 약간의 경제학적 통찰을 가진 사람이라면 “시장경제(market economy)”와 바로 이 시장경제를 출발점이자 배경 또는 환경으로 운동하는 “자본주의 경제 또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capitalism economy or capitalist market economy)가 다르다는 것은 쉬이 구분해낸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시장경제”를 물적 토대로 하는 경제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경제”를 물적 토대로 하는 자본의 민주주의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특히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이미 자본의 이데올로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경제민주주의를 ‘One dollar, one vote'(‘1원 1표’)의 원칙에 따라 운동하는 자본의 민주주의와 같은 것으로 둔갑시켜, 시장참여자들에 대한 차별과 불평등을 시정 해소하거나 또는 평등을 도모하려는 노력에 대해 딴지를 걸고 있다는 점에서 시급하기까지 하다.

참고로, 이에 대한 최근의 예는 김영용 전남대 명예교수의 <한국경제신문> 칼럼 “경제학 개념이 바로 서야 나라가 산다”, 김승욱 중앙대학교 경제학부 교수의 <뉴데일리> 인터뷰 “노동자 권익, 노조 아닌 기업경쟁력이 보장” 등이다. 덧붙여 참으로 황당한 얘기라 생각되지만, 김승욱 교수는 아예 문재인 정부의 경제민주주의가 (레닌의 소비에트) 공산주의 개념으로 이어질 위험성을 내재하고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예컨대 자본에 의한 노동차별의 자유를 조장한 결과 발생한 저임의 비정규 노동자 차별문제를 시정 해소하거나 평등을 도모하려는 노력은 분명히 자본에 의한 노동차별의 자유를 제한하는 동시에 노동시장에서 차별받는 노동자들의 경제적 자유를 증진시키려는 노력이며, 또한 노동차별의 자유란 사회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마땅히 제거해야 할 유형의 자유로 헌법에 보장된 기업 고유의 경제적 자유와 창의 그 자체는 한 움큼도 침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시장참여자들 모두의 경제적 자유를 온전히 증진시키기 위한 경제민주주의 조치다. 그러나 사정이 이러함에도 우리가 경제민주주의를 자본의 민주주의와 같은 것처럼 왜곡 또는 혼용한다면, 우리 사회의 경제민주주의 진전은 영원히 불가할지도 모르며, 그 자리에는 자본의 민주주의와 차별과 불평등의 자유까지 내포한 자본의 경제적 자유만이 또아리를 틀게 될 것이다. 

사실 경제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경우, 시장에서 우월적 지위를 행사할 수 있는 자들이 다른 시장참여자들을 차별할 자유, 권한남용을 할 수 있는 자유, 부정한 이익을 편취할 자유, 불평등을 조장하고 지속시킬 자유 등을 침해하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자유는 차별 및 불평등 상태등에 놓인 다른 시장 참여자들의 경제적 자유를 침해 구속하는 것들로, 사회적으로든 경제적으로 제거해야 마땅한 유형의 자유일 뿐이다.

그러므로 로버트 다알이 자신의 탁월한 책 경제민주주의에서도 반문했듯이, 경제민주주의와 자본의 민주주의를 분별할 수 있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반문할 수 있다. 

도대체 “어떤 종류의 평등이 어떤 종류의 자유를 위협한다는 말인가?”라고.